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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th & Hope/영화&애니&공연

[자폐증 극복기] 정신장애 자폐아 육아 극복 사례 2부

by 행복 디자이너 202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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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 극복기] 정신장애 자폐아 육아 극복 사례 2부

 

정신장애 자폐아 육아 극복 사례 2부
인간은, 여러 형태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어, 좋은 것이다.

 


■ 초등학교 ~ 중학교

초등학교는 양호학교(지금은 특별지원학교)로 처음부터 정해 버렸습니다.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만 했고 말을 못며 밖으로 뛰어 나갈 위험도 있어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누군가가 돌봐 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아(이렇게 불리우는 것을 좋아 하지는 않지만)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경험을 해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교에 다닐 수 있으면 편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 무리는 하지 말자! 시키지 말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봄 운동회, 달리기, 어떨까? 선생의 말만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으며 천천히 시간이 흘러 모두가 대단히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도 웃고 있었습니다. 애들 각자가 모두 성장했구나 라고 느낌을 갖게 하는 하루였습니다. 급식 참관 및 시식회 아장아장 걷는 쇼우(세번째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어떻게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먹고 있는지 살펴 봤습니다.

젖가락질을 잘 하지 못하는 히비끼! 선생은 부엌 가위를 늘 가지고 다니면서 고기나 생선을 잘라 줍니다. 집에서 해 준대로  똑 같이 해 주십니다. 아직도 손으로 움켜 먹거나 하지만 포크로 집어 주는 선생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제자리에 앉아서 먹고 있습니다. 급식 상당히 맛있겠지요. 먹는 것을 좋아해서 엄마가 직접 만든 간식을 아주 좋아해 맛을 아는 히비끼였기 떄문에 맛있게 먹고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릇들을 깨끗이 정리해 제 자리에 갔다 놓고 있었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 것도 할 수 있다니 놀랐습니다. 엄마 얼굴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오지도 않고 선생과 친구들과 함께 있어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학교라는 장소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곳으로 조금씩 인식하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1년생의 10월 남편이 전근가게 되어 이사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경우 익숙해졌는데 히비끼의 복지관계 수속이나 히비끼를 받아 줄 수 있도록 체제를 갖추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보니 히비끼의 웃는 얼굴이 사라졌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새로운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정신적 부담때문인지 몰라도 매일 설사를 했습니다.

학교 견학을 했지만 이전 학교와 달라서 무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유가 없는 느낌으로 그 속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있다기 보다는 손목을 붙잡고 있다는 인상이 강해 부모로서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중에, 부모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어 「갑자기 뛰어 나가거나 해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조금 더 애정을 가지고 대해 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학교에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후 여러 면에서 조금씩 개선되어 갔습니다. 부모가 애기하는 것의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정, 학교, 도우미간 서로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히비끼의 하루가 편안하게 지나 갈 수 있도록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데 모두가 노력했습니다.

드디어 중학교! 사춘기이기도 해 패닉 상황도 늘어 나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당황해서 고민하게 되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사춘기 초기이기도 해 성장과 함께 여러가지 일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만큼 말을 하지 못하는 히비끼에게는 전달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학년일 때 특히 패닉상태가 심해 져 몸을 벽 등에 부딪쳐서 종종 상처가 났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흙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흙만 보게 되면 뛰어 나가서 난리를 치는 일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 때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힘은 엄청나 내 힘만으로는 멈추게 할 수 없어 몇 번이나 둘이 흙투성이가 되었으며 여기 저기 멍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의 보도를 흙투성이로 해 버리거나 주변의 나무를 넘어뜨리거나 했습니다. 나는 매일 빗자루를 들고 다니면서 더럽혀진 곳을 청소하면서 다녔습니다. 멎추지 않았습니다. 히비끼의 마음이 차분한 날 길가에 있는 집 한채 한채를 둘이서 찾아 가 히비끼가 장애가 있다는 점 앞으로도 같은 길을 지나 가니까 지켜 봐 주기 바란다는 것을 부탁했습니다. 똑 바로 상대방을 보면서 이야기하면 이해해 줄 것으로 믿고 많은 사람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나에게 이상한 짓만 안 하면 괜찮아요」「늘 지켜 볼 테니까 안심하고 다니세요」「히비끼군을 어떻게 하면 웃게 만들 수 있을까」등등을 말해 줬습니다. 어느 분은 히비끼의 흙투성이 손가락을 물은 차가우니까 따뜻한 물로 닦아줬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멎추지 않았습니다.

■ 아직도 숨긴 것이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 가니 거짓말같이 패닉이 줄어 들고 안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기분 전환도 빨라 졌습니다.지금까지 차고 있었던 기저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니 졸업 후 일할 곳을 찾기 위해 작업장 등에서 1주일 정도 체험을 하는 현장실습기간이 있습니다. 그 이전부터 정해진 시간 간격으로 대소변을 할 수 있도록 2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도전했습니다. 성공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 났습니다. 하지만 학교와 집 이외의 화장실에서는 힘들어 해 화장실에 들어 가는 것마저 불가능했습니다. 겨우 할 수 있도록 되었는데 실습기간 1주일을 기저귀를 차고 보내게 되면 다시 0로 돌아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실습장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기분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실습 첫 번째 아침부터 간단히 가장 가까운 역이나 다른 장소의 화장실에도 들어 가 일을 보는데 성공했습니다. 2시간 간격으로 확실하게 했습니다.  정말로 놀랐습니다.

17세가 되어서 기저귀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습니다.어렸을 적에는 앞 날이 보이지 않아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17년 지나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어 가능성은 무한대로 커졌습니다. 아직도 숨겨 논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할 정도로 기쁩니다. 드디어 봄부터 고등학교 3년생. 졸업 후에 갈 곳을 정해야만 하지만 선택근은 적다. 그리고 중증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출퇴근 가능한 시설이 적습니다. 부모는 확실하게 점차 나이를 먹게 되며 체력도 쇠퇴해 집니다. 제도의 벽 지원의 손이 부족한 현재 상황을 어떻게 해서라도 극복하기 위해 보호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역격차도 해소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히비끼가 웃는 얼굴로 생활할 수 있는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히비끼가 히비끼 자신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선택을 하길..!!

 

 


■  「크레파스」와의 만남

히비끼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남편이 전근을 가게 되어 새로 이사할 곳에서의 도우미를 찾아 봤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데 새로 갈 학교 선생이 도우미파견사업소「NPO법인 피아〮파렛토」를 소개해 줬습니다. 이 곳과 「NPO법인 자립생활센터 크레파스」는 같은 장소에 있어 서로 도와 주고 있었습니다. 「크레파스」는 이제 경우 시작한 단계로 히비끼는 아이들 이용자 제1호입니다.

「크레파스」「피아 파렛트」를 통해서 이미 10년 이상이나 외출 시 도움을 받고 있는데 서로 긴밀히 커뮤니케이션하면서 히비끼가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까지 왔습니다. 직원 모든 분이 여러 형태의 고민이나 문제에 언제나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며 히비끼의 성장을 내 일같이 기뻐해 줬습니다. 내 기분이나 체력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미소로 다가 와 줬습니다. 그리고 직원 모든 분이 히비끼를 보는 표정이 언제나 『만나고 싶었다』라는 얼굴로 써져 있는 것처럼 느껴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나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크레파스」에서 일하는 분들은 여러 형태의 장애가 있습니다. 사무실 안, 여러 형태의 사람이 있는 공간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고 위화감이 없이 상당히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장애”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크레파스」여러 분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내 여동생은 장애아였습니다. 내가 10살 때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에게는 장애가 있는 동생이 자매로 그 상태가 당연했습니다.  하기 때문에 “장애”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 왔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어째서 동생은 걷지 못하냐 말을 못하냐 라는 질문을 받더라도 그것이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답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애”라는 말은 사람에게 설명할 때에만 필요한 언어였습니다. 받아 들여서 이러고 저러고 하기 이전에 당연한 존재로『인간은 여러 형태의 사람이 있어 좋은 것이다』 우리 집 둘째 딸이 2학년일 때 쓴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도이 토시미》프로필
1972년 1월 8일 京都에서 출생 현재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에서 살고 있음.
취미는 음악 청취, 사진 촬영이며 좋아하는 말은 웃는 사람에게는 복이 온다. 꿈은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어, 아주 커다란 관계를 형성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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