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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th & Hope/영화&애니&공연

자폐증 극복기 정신장애 자폐아 육아 극복 사례 1부

by 행복 디자이너 2020.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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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 자폐아 육아 극복사례 1부
인간은, 여러 형태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어 좋은 것이다.

『우리 집 장남 히비끼(響)는 중 증 지적장애를 수반한 자폐증!
현재 특별지원학교 고등부 2년생 히비끼가 태어 난 17년 전은 지금과 같이 발달장애라는 말도 요양교육이라는 말도 일반화되지 않았않았으며 지원도 충실하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를 얻는 것도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좋다고 하는 것이면 일단 도전해 봤지만 갈등의 연속
어쨌든 히비끼가 「웃는 얼굴로 생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이름은 「히비끼(響)」로 정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되었는데 몸에 이상한 것이 난 것 같아서 안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네」라면서 약간의 불안감을 느낀 신참 엄마였습니다. 7개월이 지나서 앉기 시작했지만 다리에 이상이 있어 무릎을 펴고는 앉을 수 없었습니다.
보건소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상담을 하니「한 달 후에 다시 검사하도록 하지요. 연습을 시켜서 그 상황을 지켜 봐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검에서는 「걷는 것이 늦어질지도 모릅니다. 1세 아동 건강검진에서, 그 모습을 알려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 살에 무사히 걷기는 했지만 몸 전체의 근육 긴장때문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뭐야, 이것은? 잘 걸어 다녔지만 오로지 방 안에서만 빙빙 돌면서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만두지 않습니다. 내 눈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계속 하는 것입니다. 괜찮을까? 공원에 데리고 가더라도, 놀이기구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고 친구들에게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래를 살살 만지거나 잎사귀를 가볍게 떨어뜨리거나 먹어 버리거나 합니다.

바람에 날려 보내는 것을 좋아 했는데 내가 걱정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상당히 기분좋은 모습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 미소가 걱정의 한숨을 놓게 했습니다.

2살 5개월 경에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히비끼는 애기 울음 소리를 싫어 해 오로지 음악을 듣거나 잠자거나 하면서 도피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동생 손을 꽉 쥐거나 애기 침대 위에 올라 가서 손을 잡아 당기거나 하는 위험한 행동을 해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딱 한번 내가 했던대로 여동생이 보이는 곳에 슬그머니 인형을 갖다 놓았습니다. 세 살 때부터, 여러 가지 사건이 터졌습니다. 세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 측면에서 정지된 상태를 보여 아래 동생을 난 것이 잘한 일인지 혼자서 고민하는 매일이었습니다.

수면장애인지 밤 12시경에 겨우 잠들지만 새벽 3시에는 눈을 떠 울면서 울면서 난리를 칩니다. 그러면서 아침을 맞이하기 일수죠.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할지... 나중에는 저도 불면증과 자율신경실조증에 걸려 쓸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루바닥이나 벽 여기저기에 똥이 온통 묻어 있었습니다. 자주 이러한 일이 발생했지만 「엉덩이가 더려워 진 것을 알았다는 증거다」라고 생각하면서 청소를 했어요.

히비끼가 새벽 4시경에 혼자 깨어나서 옆집 베란다로 들어 가 화분 속에 있는 흙을 먹거나 알아차린 옆집 엄마가 안고서 데리고 오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창문 열쇠도 열 수 있게 되어 바로 관리인에게 사정을 설명해 손이 닫지 않는 장소에도 열쇠를 잠겨 놨습니다. 이해해 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의 사정을 알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느낀 사건이었습니다.


■ 유치원 입학

도우미 도움도 받지 않고 한 순간도 쉬지 못하는 하루 하루의 연속이었습니다. 「부탁합니다. 누군가 저 좀 도와 주세요」라고 마음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세 살 건강검진에서 말을 못하고 원을 그리지 못하고 시선을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결과 떄문에 재검진을 받게 되었지만 거기서도 또한 「1년 후 다시 한번 상황을 보기로 하지요」라고 했습니다.

「1년 후라니? 유치원도 가야 하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불안한 상태에서 유유자적하게 집에서만 보낼 수는 없다」라고 생각해 상담을 하니 언어 상담실과 발달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모아 놓은 교실(보육원내)을 소개해 줬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경우 찾게 되어 나는 조금 안심했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아 보였습니다. 새삼스럽게 히비끼를 끌어 안고 머리를 만지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가엽게도 발달 장애가 있다는 결과를 듣고 마음이 아팠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함께 생활하는 엄마와는 상황이 다르지요. 조금씩 함께 나아 가기로 했습니다. 아직 생후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카나데는 운이 좋게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두 사람이 무상으로 돌봐 주기로 했기 때문에 히비끼가 편안히 시설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치원 입학을 위한 원서를 배부하는 날이 다가 왔습니다. 장애 여부 판정에 대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유치원인가? 입학시키는 것이 좋은가? 입학하더라도 좇아 갈 수 있을까?
히비끼가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닐까 등등. 첫 아이로서 최초의 유치원 선택으로(선택할 여지는 없었지만)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우선 일람표를 보면서 한쪽 구석에서 전화를 걸어 물어 보기로 했습니다.「발달장애가 있는 것 같은데」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원장은 바로 거절하면서 「장애아 정원은 이미 다 찮습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는 경우도 있었고 「무언가 다른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면」라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곳은 하나 이 곳마저도 안 된다고 하면 갈 곳이 없네 라는 생각에 너무 슬펴서 밖은 어두워졌지만 전기불도 켜지 않은 채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나 히비끼나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울 이유가 없지」라고 생각해 마음을 고쳐 먹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명랑한 주임 선생님은 「괜찮아요. 히비끼군이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모두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운동회가 열리니 원서를 받으려 올 때 꼭 놀러 오세요」라고 했습니다.

운동회를 구경하러 가니 「기다렸어! 히비끼군 」이라고 하면서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 발달장애라고 해서 “지금”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미래가 불투명해서 불안해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히비끼를 쳐다 보는 선생님들의 따뜻한 눈길에 그래 이곳으로 결정하자 여기가 좋을 것 같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거기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히비끼 전담으로 선생 한 사람을 배정받아 무사히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보호자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소개를 할 때 최선을 다해 우리 아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저는 어머니회 임원을 맡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학년 어머니들도 히비끼를 이해하게 됨에 따라 모두 다정하게 대해 줬습니다.

1학기 교실에 들어 가지 않고 문에 매달려서 우는 매일이었습니다. 스스로 신발도 벗지 못합니다.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나에게 선생은 웃는 얼굴로 「스스로 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지요」라고 하면서 비 오는 날에도 곁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계속 기다려 줬습니다. 1학기도 끝나가는 무렵이었습니다. 문 앞에서 히비끼를 선생에게 인계하고 살짝 숨어서 모습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히비끼가 신발을 벗고 교실로 들어 갔습니다! 선생은 나를 알아 보고 내 쪽을 향해서 살짝 웃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히비끼 나름대로 이해가 되면 조금씩 개선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니 히비끼는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으며 함께 놀지 않아. 「좀 이상한 아이네. 왜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었는데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것으로 인한 어린 친구들의 장난이나 괴롭힘 등은 어른이 차별하거나 구분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흥미”에서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모래를 뒤집어 쒸우는 것을 발견하고 「왜 그러니」하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선생도 저도 상대방 엄마도 쭉 지켜 봅니다.

있어 있어 없짢아 서로 도와주는 친구들! 아이들 모두가 이렇게 하면서 배워 가는 것이겠지요. 가장 장난을 많이 친 친구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곁에서 떠나지 않는 히비끼의 강력한 아군이 되어 있었습니다. 히비끼는 스스로 손을 잡는 경우가 없어 계산대에서 지갑을 꺼내는 한 순간에 도망을 쳐 행방불명이 되는 경우도 있고 바지 혁대에 끈을 묶어 엄마 손을 잡게 했던 어린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치원에 들어 가니 손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가나데는 오빠를 너무나 좋아 해 유치원에 오고 가는 길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잡고 다녔습니다.

유치원에 도착하면 매일 러브레타를 주는 두 명의 여자 아이가 히비끼의 손을 놓지 않고 유치원 정원을 산보했습니다. 매일 매일 강력한 도우미의 노력 덕분에 히비끼 입장에서 걸을 때에는 손을 잡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 즈음 중증 지적장애를 수반한 자폐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가장 추억에 남는 유치원 행사는 유치원 마지막 운동회입니다.
최고 학년의 참가 종목은 릴레이였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밴드를 꼭 잡고 달렸습니다. 히비끼는 밴드를 잘 잡지 못하며 다른 아이들과 똑 같은 거리를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어떤 형태로 참가할지 부모의 기분을 선생에게 전했지만 최고 학년이기 때문에 친구들의 의견을 들어 모두 함께 정하기로 했습니다.

언제나 함께 놀아 준 친구들이기 때문에 그 방법으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운동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정했는지 나도 남편도 알지 못했기 떄문에 두근두근 거렸습니다. 자 히비끼 차례다!
보고 있으니 히비끼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밴드는 그 친구가 잡고 히비끼는 어깨띠를 매고 달렸습니다. 히비끼가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달리면 그 어깨띠를 친구가 자기 허리에 차고 히비끼의 마음도 인계받아서 나머지를 달려 줬습니다.
감격! 대단히 좋은 아이디어다! 친구들이 히비끼를 동료로서 인정하고 지켜 봐 준 것입니다.

승부를 따지는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 라고 정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게 해 준 모두의 마음이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애들아! 히비끼를 믿어 줘서 고맙다! 드디어 졸업식입니다. 늘 함께 지냈던 선생과 함께 눈물 눈물 눈물.

3년 동안 일어 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멎추지 않았습니다. 히비끼도 늘 쫓아 다니는 선생과 함께 졸업증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멋있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울려 퍼진 말. 혼자서 뛰어 다니는 나에게 살며시 다가 와 껴안아 주면서 한 말.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말. 「지금 이상으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세요. 예를 들어 지금, 그 사람에게 은혜를 갚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제가 다른 사람에게 갚으면 되지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도이 토시미》프로필
1972년 1월 8일 京都에서 출생해 현재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에서 살고 있음.
취미는 음악 청취, 사진 촬영

출간
좋아하는 말은 웃는 사람에게는 복이 온다.
꿈은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어 아주 커다란 관계를 형성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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