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역사 공부]
서기 1661년
스웨덴 지폐 발행/보일의 화합물 이론/지폐의 탄생
스웨덴 지페 발행
(서기 1661년)
스웨덴 중앙은행이 1661년 은행권,
즉 지폐를 최초로 사용해 화폐 액면에
변화를 몰고왔다.
인류는 고대부터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면서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재원과 돈을 관리했다.
중세 시대에는 주조화폐가 각국의 시장에서
교환되었으며, 이를 전당포 업자들에게
빌리기도 했다.
환어음, 신용, 금괴 예치금이 거래되기도 했다.
중세시대 은행의 주 업무는 현대 은행과 달리
예치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17세기 초 해외무역이 시장과 화폐에 변화를
유도하면서 은행도 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된 후
유럽 주요 은행들이 뒤를 이었다.
유럽의 동전 시대는 18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으나, 1661년 스톡홀름 은행이
은행권 발행을 시작했다.
이 지폐는 동전으로 바꿔갈 수 있었다.
스웨덴은 국내에 있는 구리를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었기에 구리로 동전을 만들었다.
역사가들은 구리 동전 구조가 지폐의
발전을 방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1667년 과도한 대출로 스톡홀름은행은
파산했지만 지폐는 상용화됐다.
1694년에 영국은행이 1695년에는
스코틀랜드은행이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덕분에 오늘날 우리의 지갑은
훨씬 가벼워졌다.
지폐의 탄생
인쇄의 혁신에 필적한 지폐의 인기
유형의 화폐는 여러 문화에서 다양한
기능을 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형태를 지닌다.
인류학자들은 최초 화폐의 증거를
기원전 1600년~기원전 1000년 중국의
별보개조개 껍데기에서 찾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전이 주조됐다.
기원전 17세기 후반 중국 주나라는
공식적으로 동전을 발행했다.
동전 경제가 변화하면서 동전의 형태도
변화를 겪었다.
대체로 왕권이 교체될 때 그 형태도 변했다.
기원후 15세기 송 왕조는 단일확폐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지폐 경제의 초석을 놓았다.
뽕나무껍질을 이용해 최초로 종리를 만들기
시작한 곳이 중국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중국이 지폐제도를 채택한 최초의 문화권이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중국이 인쇄기술에서 이룩한 기술혁신은
지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0~13세기 송나라 때 중국의 화폐제도는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정부가 화폐의 유통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일화폐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상인들이 발행하는 지폐는
단순히 자신들에게 동전이 예치되어 있다는
영수증으로 이용됐다.
1024년 국가가 화폐 배포권을 독점하면서
개인의 화폐 발행은 금지됐다.
뽕나무껍질 종이로 때로는 큰 냅킨
크기로 발행됐던 중국 지폐에는 황제의
도장과 함께 금이나 은으로 정해진 값이
적혀 있었다.
한 장의 지폐가 수천 개 동전과 똑같은
가치를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지폐의 사용으로 거액의 가치를
가볍게 지닐 수 있게 됐다.
13세기 몽골이 지배할 때 지폐 사용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쿠빌라이 칸은 세금을 걷거나 나라의 돈을
이동할 때 편리한 지폐제도를 장려했다.
송 왕조 때 발행된 지폐를 무효화한
쿠빌라이는 은으로 바꿀 수 있는 지폐들을
새로 발행했다.
송 왕조의 지폐제도는 옛날의
화폐 제도와 유사했으나 몽골 지배 하에서는
주요 통화로서의 기능을 가졌다.
심지어 여행하는 상인이나 무역업자 같은
외국인까지도 동전을 지폐로 바꾸었다.
1350년 들어 몽골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중국 정부는 부채를 갚기 위해 다량의
지폐를 발행했다.
지폐가 그 가치를 상실하면서 지폐의 사용도
줄어들었다.
몽골 후에 일어난 명 왕조는 새로운 지폐를
발행하며 동전의 사용을 금하기도 했으나
결국 이 정책은 포기했다.
몇몇 예외는 있지만 중국에서 지폐가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였다.
보일의 화합물 이론
(서기 1661년)
아일랜드의 과학자이며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로버트 보일이 "희의적인 화학자"를
1661년에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세상은 완벽하게 썩이지
않는 물질, 또는 합쳐서 화합물을 형성
할 수 있는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창해 근대 화학을 발전시켰다.
보일은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물질 입자가 화학적인 화합물을 형성한다고
설명했지만, 이 입자들이 원자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물을 모두 출판했지만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것은 쑥스러워했다.
그럼에도 그의 책은 근대 화학의
토대가 됐고, 보일은 화학의 아버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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